맹목의 덫 제17화 - 거미줄 속의 포식자, 뒤바뀐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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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의 화려한 카펫 위로 국회의원의 생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도준은 기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엄마가 작두질을 끝내고 정갈하게 약초를 정리하던 그 평온함이었다. 그는 피 묻은 메스를 국회의원의 고급 실크 셔츠에 닦아내고는, 유진이 준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끝났어. 약속한 정보를 내놔." 하지만 무전기 너머에서는 차가운 침묵만이 흘렀다. 잠시 후, 지지직거리는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준아, 넌 너무 위험해. 엄마가 널 왜 괴물이라 불렀는지 이제 알 것 같네." 그것은 유진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협력자의 온기 대신 사냥꾼의 냉혹함만이 서려 있었다. 유진의 배신: 사냥개가 된 사냥꾼 도준은 자신이 처음부터 유진의 체스판 위에 놓인 말에 불과했음을 직감했다. 유진이 원한 것은 국회의원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사라질 완벽한 용의자였다. 펜트하우스 밖으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유진은 도준의 위치를 경찰에 흘린 것이었다. 도준은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유진이 준 지도를 찢어버렸다. "엄마, 사람들이 또 나를 속여.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그랬잖아. 쓴 약일수록 몸에 좋다고." 도준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은 그가 직접 조제한 아드레날린 촉진제였다. 도시는 이제 도준에게 거대한 감옥이자 함정으로 변했다. 그는 빌딩 사이의 좁은 틈새와 환기구, 지하 배수구를 마치 자신의 집처럼 누비며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유진은 도준이 항구 근처의 폐창고로 숨어들도록 유도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미리 매복시킨 킬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준이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거대한 서치라이트가 켜지며 그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여기까지야, 도준아. 네 엄마 곁으로 보내줄게." 유진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장전되는 총기 소리가 창고 안의 정적을 깼다. 하지만 도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맹목의 덫 제16화 - 네온사인 아래의 안개, 도시의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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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은 읍내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스팔트 위 웅덩이에 반사되어 기괴한 원색의 문양을 만들어내는 거리. 도준은 그 낯선 소음과 빛의 홍수 속에서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더 이상 읍내의 바보 도준이 아니었다. 병원 환자복 대신 훔쳐 입은 검은 코트는 그의 마른 체구를 가려주었고, 눌러쓴 모자 챙 아래로 번뜩이는 눈빛은 도시의 포식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준 '숨 죽이는 법'은 인파 속에서 완벽한 보호색이 되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 속에 스며든 읍내의 향기 도준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화려한 빌딩 숲 뒤편, 썩은 물비린내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뒷골목의 허름한 전당포 앞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수건에 정성스럽게 싸인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불타버린 약재상 지하실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챙긴, 읍내 국회의원의 치부책 중 일부였다. 전당포의 낡은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경알이 두꺼운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맞이했다. "뭐 하는 놈이야? 여긴 아무나 오는 데가 아닌데." 노인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도준은 대답 대신 수첩의 한 페이지를 찢어 노인의 앞에 놓았다. 노인의 눈이 커지더니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종이에는 노인이 평생 숨기고 싶어 했던 과거의 범죄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걸... 네가 어떻게..." 노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도준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엄마가 그랬어요.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대신 비밀을 아는 사람은 대접받아야 한대요." 도준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워 오히려 뱀의 혀처럼 서늘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전당포 노인을 협박해 현금과 가짜 신분증, 그리고 은밀하게 거래되는 날카로운 의료용 메스 세트를 손에 넣었다. 엄마의 은침보다 더 길고, 더 예리하게 살을 파고들 수 있는 도구...

맹목의 덫 제15화 - 박제된 기억과 안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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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당의 화염은 읍내의 반을 태워버릴 듯 기세등등했으나, 결국 차가운 새벽비에 굴복하며 검은 연기만을 남긴 채 사그라들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탄 시신들과, 그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도준뿐이었다. 엄마의 시신은 불길 속에서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경찰은 이 참극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 도망자(엄마)에 의한 동반 살살 미수 및 방화'로 잠정 결론지었다. 도준은 인근 대도시의 정신병동 폐쇄 구역에 수용되었다. 그는 더 이상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 완벽한 '백치'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지워진 기억인가, 박제된 연기인가 형사 제문은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들의 자창(刺創)은 노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깊고 정교했다. 제문은 병원 복도의 그림자 속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도준을 관찰했다. 도준은 하루 종일 창밖의 안개만을 바라보며 가끔 입술을 웅얼거렸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도준이 극한의 트라우마로 인해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빠졌다고 진단했지만, 제문은 믿지 않았다. 그는 도준이 스스로 머리 뒤편에 은침을 꽂던 그 마지막 찰나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망자의 눈이 아니라, 진실을 영원히 가두려는 자의 결연한 눈빛이었다. "도준아,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 제문이 방 안으로 들어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도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제문은 도준의 손등을 유심히 살폈다. 작두를 휘두르고 침을 놓던 그 정교한 근육의 움직임은 사라졌으나, 손등에 남은 작은 흉터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증거였다. "네 엄마는 죽었어. 불타서 재만 남았다고. 근데 신기하지 않니? 그 난리통에 이 침통 하나만은 멀쩡하게 남았더라." 제문이 검은 재가 묻은 엄마의 은침통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도준의 호흡이 아주 짧게 멈췄다. 제문은 ...

맹목의 덫 제14화 - 작두의 울음과 핏줄의 종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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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폭풍우 속에서 약재상 '보경당'은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마당 곳곳에 켜진 촛불들은 비바람에 일렁이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지붕 위에서 춤을 추던 도준의 실루엣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 있었다. 국회의원이 보낸 전문 킬러들이 담장을 넘어 마당으로 진입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어리숙한 청년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숨어 기다리는 포식자였다. 도준은 엄마가 작두를 갈 때 쓰던 숫돌의 리듬을 타며,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침입자의 목을 정확히 겨냥했다. 피로 물든 약재상, 사냥꾼이 된 아들 도준의 공격은 전율이 돋을 만큼 잔혹하고 정교했다. 그는 총을 든 사내들의 사각지대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엄마가 가르쳐준 '인체의 급소'는 이제 사람을 살리는 약방의 지식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생명을 끊어내는 살인 기술이 되어 있었다. "아저씨들, 우리 엄마가 집안싸움에 남들 끼어드는 거 아니랬는데." 도준의 무거운 작두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비명이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화약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인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준은 자신의 몸에 튀는 피를 마치 훈장처럼 여기며, 광기 어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킬러들이 중화기를 난사하며 약재상 건물 안으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도준은 이미 지하 통로와 약초 저장실을 이용해 그들의 뒤를 잡고 있었다. 그는 엄마가 숨겨둔 고농축 마취 가스를 터뜨려 침입자들의 시야를 가렸고, 눈이 먼 자들의 심장에 은침을 박아 넣었다. 도준은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즐거운 놀이인 양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에게 있어 이 학살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사랑의 결실'을 증명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광기의 축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약재상의 대문이 천천히 열리며 핏기 없는 얼굴의 엄마가 나타났다. 어미의 자책과 마지막 은침 탈옥하여 읍내까지 기어온 엄마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

맹목의 덫 제13화 - 거미줄에 걸린 포식자들과 소년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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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의 공기는 이제 도준의 숨결을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약재상 '보경당'은 더 이상 병든 자들이 약을 짓던 자비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읍내의 모든 비밀이 모여들고, 그 비밀을 대가로 사람들의 영혼을 저당 잡는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준은 엄마가 앉던 작두 앞에 앉아 더 이상 약초를 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국회의원의 비서관, 파출소장, 그리고 읍내 요식업 조합장 등 한때 고개를 꼿꼿이 세우던 자들을 줄 세워놓고 그들의 은밀한 죄를 하나하나 읊조리며 즐거워했다. 공포로 세워진 왕국, 도준의 기괴한 통치 도준은 엄마가 남긴 치부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체적인 고통을 주는 대신, 그들의 정신을 서서히 갉아먹는 '특별한 한약'을 처방했다. 엄마가 불면증 환자들에게 지어주던 안신제(安神劑)에 환각 성분이 강한 자생 약초를 교묘히 배합한 것이었다. 이 약에 중독된 읍내 유력자들은 도준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며 자신들의 금고를 열었고, 도준이 시키는 대로 마을의 여론을 조작했다. 도준은 이제 바보 연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읍내를 지배하는 소년 왕으로서, 자신을 멸시하던 세상을 향해 잔혹한 보복을 시작했다. 특히 도준은 소녀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던 자들을 향해 가장 가혹한 '치료'를 베풀었다. 국회의원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가 그가 평생 전신 마비로 살 수밖에 없도록 특정 혈자리에 은침을 꽂아 넣었고, 사건을 덮으려 했던 경찰들에게는 매일 밤 소녀의 환영을 보게 만드는 향을 선물했다. 읍내 사람들은 도준의 눈을 피하기 바빴지만, 동시에 그가 주는 약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준은 작두를 갈며 중얼거렸다. "엄마, 사람들이 이제 나한테 다 무릎을 꿇어. 엄마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쉬운 건데." 하지만 도준의 왕국에도 균열은 생기기 시작했다. 형사 제문은 도준의 변화를 끝까...